금제국 (Jin dynasty, Jurchen)        1000 ~ 1100  2009. 4. 27.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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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이 일어날 당시 동양에서 가장 강력했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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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1115년~1234년)은 북방 유목 민족 중 하나인 여진족 아구타가 세운 왕조로 1115년 아구타가 국호를 대금(大金), 연호를 수국(收國)이라고 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면서 정식으로 금나라가 역사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수도는 북송 시대에는 상경 회령부, 남송 시대에는 중도(中都)였으며, 몽골의 침략 이후로 수도를 카이펑으로 천도했다.

1125년에 여진의 금(金)왕조는 거란족를 합병하고 1153년에 수도를 요(遼)의 남경으로 이동하여 이곳을 중앙수도인 중도(中都)라고 불렀다. 1215년에 몽골이 중도를 불태우고 1237년에 금(金) 수도의 북쪽으로 다시 재건하였다.

 역사

금나라 건국 이전에 여진족들은 지금의 만주 헤이룽장 성에 거주하던 민족이었다. 여진족이라는 표현은 10세기 여진족 언어의 "여진"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이 단어의 기원은 현재 학계에서 합의되지 않은 상태이다. 고구려발해의 지배를 받다가 요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요나라의 지배가 약화되면서 여진족들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결국 여진족들은 거란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1115년 아골타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등장해 부족을 통합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금나라를 건국했다. 여진족은 자신의 왕조를 고향에 있는 강의 이름을 따라 금(金)이라고 지었다.

2대 태종 때인 1125년에는 송나라와 동맹을 맺고 를 협격하여 만주지역으로부터 요를 멸망시켰다. 1126년에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점령하자 이들은 권력을 잡게 되었다. 여진 군대는 장강까지 남하하였으나 회하 부근에서 저지되고 남송은 일단 국경을 방어하게 되었다.

그러나 금나라는 송나라와의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자 송나라 수도였던 허난 성카이펑을 공격하여 1127년에 송나라의 상황 휘종황제 흠종 등을 사로잡고 송나라를 강남으로 밀어냈다.

여진 부족들은 전쟁에 뛰어났으나 정착하여 수십년을 지내게 되자 점차 스스로 유목 정체성을 잃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중국 한족과 혼인하기 시작하였으며 남송과의 평화를 공고히 하였다. 금나라의 지배자들은 유교 이념을 따르게 되었다.

1189년에 금나라는 몽골과 남송을 상대로 두개의 전선에서 싸우게 되었다.

제8대 선종(재위 1213년 ~ 1223년)은 1214년몽골군의 공격을 받고 이를 피하여 도성을 베이징에서 카이펑으로 옮겼다.

1234년 제9대 애종은 몽골, 남송 연합군의 추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함으로써 금은 건국 120년 만에 멸망하였다.

후금(後金)은 누르하치여진 여러 부를 통일하여 1616년에 건설한 나라이다.

여진의 선조는 5대(五代)·(宋)의 무렵 여진(女眞)이라 불리었고, 그 중 한 부족에서 이 나와 (遼)를 멸하고 다시 송을 남방으로 쫓아버린 후 몽골에 의해 멸망되기까지 중국 북부를 점거하고 있었다. 이를 계승하고 부흥시킨 의미에서 후금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었으나 태종 때 점차 중국 정복을 노리게 되면서 한인(漢人)들의 과거의 반감을 피하여 1636년 대청(大淸)이라 고쳤다.

 

여진

 

여진(女眞, 중국어 간체: 女真, 정체: 女眞, 병음: nǚzhēn)은 만주 일부와 한반도 북부에서 거주했던 퉁구스 계통 민족으로, 17세기만주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금나라1115년1122년 사이에 세웠으며 이 왕조는 1234년까지 건재하였다. 그 후 1586년 누르하치가 여진의 세 부족을 통합하고 연합된 부족의 이름을 만주족으로 바꾸었다. 누르하치는 유목 법령을 통합하여 강력한 제도를 만드는데, 이는 후금(後金)과 중국을 점령한 후의 (淸)제국이 된다.

 

 금나라

여진족이라는 표현은 10세기 여진언어의 "jušen"이라는 단어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이 단어의 기원은 현재 학계에서 합의되지 않은 상태이다. 숙신(肅愼)과 동일 기원을 가진 단어일 수 있다는 가정이 제기되었으나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영미권에서는 Jurche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몽골어에서 여진족을 가리킬 때 사용했던 단어인 Jürchen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북만주의 여진 부족들은 원래 거란의 신하들이었다. (요나라참고) 1115년 완안 아골타가 그들을 통일하여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1126년 요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점령하자 이들은 권력을 잡게 되었다. 여진 군대는 장강까지 남하하였으나 회하 부근에서 저지되고 남송은 일단 국경을 방어하게 되었다.

여진족은 자신의 왕조를 고향에 있는 강의 이름을 따라 금(金)이라고 지었다. 여진 부족들은 전쟁에 뛰어났으나 정착하여 수십년을 지내게 되자 자신의 유목 정체성을 잃게 되었다. 결국 여진족은 점차 한족화 되어갔으며, 남송과의 평화를 공고히 하였다. 금나라의 지배자들은 유교를 따르게 되었다. 1189년 금나라는 몽골과 남송을 상대로 두개의 전선에서 싸우게 되었다. 1215년 몽골 군대의 압력 하에 이들은 수도를 베이징에서 카이펑으로 옮겼으나 1234년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되었다.

 문화, 언어 그리고 사회

여진족은 일반적으로 초기 조상들의 유목 전통을 따랐다. 거란과 몽골족들처럼 이들은 힘과 말을 다루는 기술 그리고 궁술과 사냥을 즐겼다. 그들은 샤먼 의식을 행하였으며 하늘 신 (abka-i enduri 또는 abka-i han)을 섬겼다.

초기 여진 문자는 1120년 완안 아골타 (完顏 阿骨打)의 명에 따라 완안희윤(完顔希尹: Wanyan Xiyin)에 의하여 발명되었다. 이것은 거란 문자에 기반한 것이었으며 거란 문자는 다시 한자에 기반하였다. 그러나 중국어는 고립어이며 여진 및 거란의 언어는 교착어이기 때문에 이러한 표기 방식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여진 문자는 금나라가 멸망하자 급속히 사라졌고 여진어는 입말로만 살아남게 된다. 이후 16세기 말까지 여진족은 몽골어와 중국어를 이용해서 문자생활을 하다가 만주어가 문어로 정리되기 시작하면서는 만주어를 이용한 문자생활을 하게 된다.

여진 사회의 문화는 몽골족의 큰 영향을 받았다. 몽골족과 여진족 둘 다 정치적 지도자에게 "한"(Khan: 문어몽골어로는 qaɣan, 만주어로는 han으로 표기됨.)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으며 이는 황제이든 부족장이든 가리지 않고 사용되었다. 아주 강력한 부족장은 "beile"[bəilə] (왕자, 귀족)이라고 불리었는데 이는 몽골의 "beki"와 터키 민족의 "beg" 또는 "bey"에 해당한다. 또한 몽골족과 터키 민족처럼 여진족은 맏아들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능력이 있는 아들 또는 사촌은 누구든지 지도자로 선택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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