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바 공화국(Repubblica di Genova)        1000 ~ 1100  2009. 4. 28.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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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바르드족이 세운 북이탈리아 도시국가 중 하나. 롬바르드 도시국가들: 피렌체, 제노바, 밀라노, 베로나, 파비아 등.
요약
중세 ·근대 이탈리아의 지방 국가.
본문

이탈리아 서부의 고도() 제노바는 11세기 후반에 도시귀족(, )이 단결하여 종래의 봉건영주 ·주교()의 지배에 항거하여 12세기 초에는 자치도시가 되었다. 이어 피사와 함께 서(西)지중해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십자군을 지원, 동()지중해로부터 흑해()에 이르는 각지에 거류지를 구축하였다. 13세기 말에는 피사와의 경쟁에서 승리, 베네치아와 어깨를 겨루는 지중해의 대세력이 되었으나,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진출에 밀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1453)당한 뒤에는 식민제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14세기 말 이후에는 자주 밀라노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으나, 1528년 이후 합스부르크가()의 지지를 얻어서 자치권을 회복하였다. 이 시대의 지중해무역의 부활에 의하여 상업과 금융업으로 번영하였으나, 17세기에는 쇠퇴하여 1768년 코르시카섬을 프랑스에 할양하였다. 나폴레옹에 의하여 리구리아 공화국으로 개조되었다가 1805년 프랑스 제국에 편입되었다. 15년 빈회의의 결과 사르데냐 왕국에 병합되어 결국 멸망하였다.

중세·근대 이탈리아에서 번영했던 상업국가. 12세기 초엽 십자군을 지원하기 위한 선단(船團)이 제노바로부터 성지에 파견된 뒤 도시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특별한 서약단체인 코무네가 만들어졌다. 코무네는 처음에 임시적 성격을 띠었지만 차츰 자리를 잡아 사실상 공화국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코무네를 형성한 중심세력 속에는 봉건귀족과 주교의 가신이 들어 있었고, 지배영역은 동·서해안과 배후의 골짜기까지 뻗어 있었다. 해상활동이 발전하자, 사르디니아·엘바·코르시카 등으로 진출하여 13∼14세기에는 키오스·레스보스·콘스탄티노플에 인접한 펠라·크리미아반도·돈강 어귀의 타나(아조프) 등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베네치아에 견주는 지중해의 대상업국가를 건설하였다. 베네치아에서는 상업활동과 식민지활동을 국가가 통제하고 있었지만, 개인주의적 색채가 짙은 제노바에서는 이러한 활동도 세력가 집단에 의해 시행되었기 때문에 본국과 식민지 사이에 대립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도시 안에는 G. 피에스키·F.M. 그리말디·A. 도리아·C. 스피놀라 등의 귀족들이 각각 유력한 당파를 형성하여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노바공화국의 역사는 매우 불안정하였다. 귀족지배에 대해 시민이 저항운동을 벌여 1339년 S. 보카네그라가 도제 통수(統首)에 취임하였다. 귀족층은 도제직에 오를 수 없었지만 그 뒤로도 도시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귀족과 일부 유력한 시민은 도시 안에 큰 저택을 꾸며 놓고 일족뿐만 아니라 고용인과 가신들도 같이 살게 하여 세력을 과시했다. 이러한 동족단을 제노바에서는 <알베르고 데이노빌리>라고 하였다. 15세기 초에는 국가에 대한 채권자 단체인 세인트조지은행을 만들어 국가재정을 독점하고 식민지경영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유력한 가계를 중심으로 한 당파 대립은 공화국 정치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밀라노와 프랑스에 정치개입의 구실을 주게 되었으며, 실제로 14세기 이후 제노바는 종종 외국세력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1528년 유명한 제독 도리아가 프랑스를 배반하고 신성로마제국황제 카를 5세에게 돌아와서 공화국 자치제도를 회복시켰다. 그 뒤로 공화국 통치는 임기 2년인 도제가 맡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태는 1797년 프랑스군이 침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뒤 한때 리구리아공화국이 되었다가 1805∼1814년 프랑스에 합병되었고, 다시 1815년 1월 사르데냐왕국에 합병되어 제노바공화국의 역사는 끝났다.

제노바의 역사
2세기 로마의 전선거점으로 건설된 뒤 로마에서 마르세유에 이르는 아우렐리아거리의 중요지점으로 발전하였다. 6세기 비잔틴제국령, 7세기 랑고바르드왕국령이 되었다. 위치상 배후지의 혜택을 입지 못하여 일찍이 해상활동으로 진출하였는데, 10세기에는 이슬람 해상세력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이 시대 제노바는 오베르텡기공 영토로 되어 있어 그 신하가 다스렸는데, 그 집안에서 C. 스피놀라가(家)와 같은 유력한 도시귀족이 생겨났다. 10세기 말부터 이슬람 세력에 대한 반공(反攻)이 시작되었고, 11세기에는 피사와 함께 사르디니아와 발렌시아를 공격하여 서지중해 일원으로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십자군 활동에 참가하여 레반토로도 진출하였다. 11세기 말부터 12세기 초에는 자치도시 코무네가 형성되어 사실상 공화국이 되었다. 서지중해에서는 피사와 싸워 승리를 거두었고, 동지중해에서는 동방무역 패권을 둘러싸고 베네치아와 극심하게 싸워 13∼14세기에 키오스섬·레스보스섬·흑해 연안 등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거래상품은 향료·피혁·올리브유·포도주·곡물과 노예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특히 15세기에는 키오스섬을 기지로 삼고 매염제(媒染劑)로 사용되는 백반을 소아시아로부터 유럽에서 가장 큰 모직물 생산지인 플랑드르로 대량 수송하였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오스만제국이 진출하자 흑해와 에게해 식민지를 잇달아 잃게 되었다. 제노바 상인들은 막대한 재산을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 투자하여 신대륙과 대서양 연안무역에 큰 역할을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밀라노·프랑스·에스파냐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17세기에는 사보이아가(家)의 개입을 배제해야 했다. 오스트리아계승전쟁(1740∼48)에서 오스트리아군에 포위당하여 1768년 마지막 식민지인 코르시카를 프랑스에 내주고 1815년 사보이아가의 지배 아래 들어가 사르데냐왕국의 항구로 발달하였다. 1861년 이탈리아왕국이 성립되자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무역항으로 발전하여, 상공업도시 밀라노·토리노와 함께 이탈리아 산업혁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제노바 [Genova]
BC 7세기경부터 리구리아인()의 항구도시로서 알려졌으며, 11세기에는 상인과 귀족의 단결로 자치도시를 형성하였다. 십자군원정 무렵부터 협력하여 동()지중해와 중동에 진출하였으며, 베네치아와 함께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12∼13세기에는 많은 해외식민지를 획득하고, 상업·금융업·해군력 등으로 지중해의 일대세력이 되었으며, 내륙에도 영토를 확대하였다. 그러나 1380년의 키오지아해전에서 베네치아에 패배한 뒤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내정의 혼란으로 밀라노공()과 프랑스 왕 등의 지배를 받다가 1528년에 카를 5세의 원조를 얻어 다시 자립하였다. 그러나 오스만투르크의 진출로 해외의 근거지를 차례로 상실하였으며, 1768년에는 마지막 식민지인 코르시카섬을 프랑스에 양도하였다. 이처럼 원격지() 교역이 쇠퇴한 후에도 제노바의 상인 자본은 유럽 금융의 중심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797년에 나폴레옹에 의해 리구리아 공화국으로 개조되었다가 프랑스 제국에 병합되었으며, 빈회의(1815) 후부터 사르데냐 왕국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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