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왕국 (Regno di Sicilia)        1000 ~ 1100  2009. 4. 28.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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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때 시칠리아섬과 이탈리아반도 남부를 지배한 왕국. 9세기 전반부터 이슬람세력지배하에 있었던 시칠리아섬은 11세기 후반에 노르만 출신 기사(騎士) 로베르트 구이스카르드(로베르 기스카르)와 로제르(1세) 형제에 의해 정복되었으며, 로제르 1세의 아들 로제르 2세가 1130년에 시칠리아왕에 즉위함으로써 새로운 왕국이 성립되었다. 노르만기사는 먼저 이탈리아반도에 정착한 뒤 시칠리아 정복을 개시했기 때문에 시칠리아왕국의 수도는 팔레르모에 있었으나, 영토는 반도 남부와 섬 양쪽에 걸쳐 있었다. 로제르 1세·2세는 종교적 관용정책을 취하고, 이슬람시대의 통치기구를 이용하면서 권력의 집중을 추진하였다. 이리하여 시칠리아왕국은 가톨릭세계의 한 끝에 있으면서 이슬람문화 및 그 이전의 비잔틴문화의 영향을 유지한 특이한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1189년에 노르만왕조의 남계(男系)가 끊기자, 호엔슈타우펜왕조의 하인리히 6세가 혼인관계로 왕위에 올랐다. 그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왕국을 교황청의 봉건신하적 위치에 머물러 두게 하려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와 다투고, 시칠리아왕국을 발판으로 황제권확립을 시도하였다. 이 시대에 시칠리아왕국은 최고의 번영을 누렸으나, 프리드리히가 죽은 뒤 한때 그들은 앙주가의 지배를 받았으며, 1282년에는 2개 국가로 분열되었다. 1442년 아라곤의 알폰소 5세가 나폴리를 정복하고 양국가를 결합시켰고, 1503년에 에스파냐왕 페르난도 5세(가톨릭왕)가 국왕에 즉위함으로써 시칠리아왕국은 사실상 에스파냐에 합병되었다.

시칠리아왕국 [Kingdom of Sicilia(Sicily)]
요약
서양 중세 이후 시칠리아섬과 이탈리아반도 남부를 지배한 왕국.
본문

11세기 말 노르만의 로제르 1세가 시칠리아를 점령한 후 그의 아들 로제르 2세가 1130년 건국한 나라로, 이전의 비잔틴제국과 이슬람 지배 세력의 전통을 계승한 중앙집권적 국가였다. 1194년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6세와의 결혼 관계로 독일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지배를 받아 프리드리히 2세(재위 1215∼1250) 때 정치적 ·문화적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1266년 교황 클레멘스 4세가 프랑스의 앙주백() 샤를에게 시칠리아를 위임하자, 로제르 2세의 서자() 만프레드가 대항하다가 실패하였고, 1282년 시칠리아의 만종()사건으로 앙주가()의 지배는 벗어났으나 곧 이베리아반도의 아라곤왕국 페드로 3세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시칠리아의 왕이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왕을 겸했으나, 이후에는 나폴리왕국은 앙주백이, 시칠리아는 아라곤왕이 지배하였다. 1443년 아라곤왕 겸 시칠리아 국왕 알폰소 5세(재위 1438∼1481)가 나폴리왕국을 점령하여 스스로 양()시칠리아의 국왕이라 칭하였다. 1647년 에스파냐왕을 겸한 아라곤의 지배에 대항한 시칠리아 도민의 반란이 있었으나 진압되어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았고, 1713∼1720년 이탈리아의 사보이가()가 시칠리아를, 오스트리아가 나폴리왕국을 지배하다가 1734년 양 지역 모두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나폴레옹체제 붕괴 후인 1816년 페르난도 7세(재위 1814∼1833)가 종래 시칠리아왕국과 나폴리왕국을 정식으로 병합하여 양시칠리아왕국을 건설하였다. 1820, 1848년의 혁명을 거쳐 1860년 5월에는 G.가리발디가 ‘붉은 셔츠단’을 이끌고 상륙하여 에스파냐의 프란시스코를 축출하였다. 같은해 10월에는 국민투표 실시로 이 지역이 사르데냐왕국으로 병합되어 양시칠리아 왕국은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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