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8년 중국 서북부의
오르도스(Ordos)와 간쑤(
甘肅) 지역에서
티베트 계통의
탕구트족(Tangut, 党项
族)이 세운 나라이다. 본래의 명칭은 대하(
大夏)이지만, 송(
宋, 960~1279)과
중국의 사서(
史書)에서 중국의 고대 왕조인 하(
夏)와 구분하여 서하(
西夏)라고 불러 이 명칭으로 널리 알려졌다. 11세기~12세기에 동서교역을 매개하며 유목과 농경, 불교 문화가 결합된 독창적인 문화를 발달시키며 내몽골[
內蒙古]에서 둔황[
敦煌],
란저우[
蘭州]에 이르는 지역에 세력을 넓혔다. 하지만 1207년 몽골에 복속된 뒤, 1227년
칭기즈칸(
成吉思汗, 1155 ?~1227)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탕구트는 티베트 계통의 종족으로 원래는
쓰촨성[
四川省] 서북부의 송판고원[
松藩高原] 일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였지만, 당(
唐, 618~907) 중기에 토번(
吐蕃)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점차 동북쪽으로 이동해 닝샤[
寧夏], 간쑤[
甘肅], 산시[
陝西] 지역에 정착하였다. 탕구트는 8부(
部)로 나뉘어 있었는데, 탁발부(
拓跋部)의 족장인 탁발사공(
拓跋思恭)은
황소의 난(875∼884) 때 당(
唐)이 장안(
長安, 지금의
西安)을 탈환하도록 지원하여 881년 당(
唐)에서 하주정난군절도사(
夏州定難軍節度使)에 임명되었고, 883년에는 당(
唐) 황실(
皇室)의 성씨(
姓氏)인 이(
李)씨 성을 하사(
下賜)받았다. 그 뒤로 탁발부(
拓跋部)는 대대로 이씨 성을 사용하였다.
당(
唐) 말기 이후
오대십국시대(
五代十國時代, 907~979)를 거치면서 탕구트는 점차 독립된 세력이 되었는데, 983년 족장인 이계봉(
李繼捧)이 송(
宋)에 투항하자, 이계천(
李繼遷)은 송(
宋)으로부터의 자립(
自立)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였다. 송(
宋)은 1004년 이계천(
李繼遷)이 죽자 그의 아들 이덕명(
李德明)을 서평왕(
西平王)으로 봉(
封)하며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덕명(
李德明)의 아들인
이원호(
李元昊, 1003~1048)는 1032년 서평왕(
西平王)의 지위를 이어받아 탕구트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간쑤[
甘肅] 지역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1036년
서하문자(
西夏文字)를 만들어 보급하였으며, 송(
宋)의
행정조직을 본떠 관제를 정비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1038년 송(
宋)에 공물을 보내는 것을 중지하고 스스로 대하(
大夏)의 황제임을 선포하였으며, 독자적인 연호(
年號)를 사용하고 수도를 흥경부(
興慶府, 지금의
寧夏省 銀川)로 정하였다. 대하(
大夏)라는 명칭은 중국의 고대 왕조인 하(
夏)를 계승하였다는 뜻을 나타내는데, 송(
宋)에서는 이를 서하(
西夏)라고 불렀다.
1039년 서하(
西夏)의 경종(
景宗) 이원호(
李元昊)가 송(
宋)에 대등한 관계를 요구하자, 송(
宋)의 인종(
仁宗, 1010~1063)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서평왕(
西平王)의 관작(
官爵)을 몰수하고 서하(
西夏) 정벌을 추진하였다. 이로써 1040~1042년까지 서하(
西夏)와 송(
宋) 사이에 여러 차례의 전쟁이 벌어지는데, 이를 ‘송하전쟁(
宋夏戰争)’이라고 한다. 1040년 서하(
西夏)는 연주(
延州, 지금의
陝西省 延安)를 공격하였고, 삼천구(
三川口)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송(
宋)은 서하(
西夏)에게 패배하였다. 서하(
西夏)의 강성함을 깨달은 송(
宋)의 인종(
仁宗)은
범중엄(
范仲淹)과 한기(
韓琦) 등을 파견해 서하(
西夏)를 방비케 하였지만, 1041년 호수천(
好水川) 전투에서 다시 14000명 정도의 병사가 전사하는 큰 패배를 당하였다. 1042년에도 송(
宋)은 정천(
定川, 지금의
寧夏省 固原의 서북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서하(
西夏)의 군대에게 갈부민(
葛怀
敏) 등의 장수(
將帥)와 9000여명의 병사가 전사하는 큰 패배를 당하였다.
하지만 1042년부터 두 나라는 화의(
和議)를 진행하였다. 서하(
西夏)는 송(
宋)과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경제 교류의 단절 때문에 물자 부족의 어려움을 겪었다. 1042년에 서하(
西夏)는 황족(
皇族)인 이문귀(
李文貴)를 송(
宋)에 파견해 강화(
講和)를 요청했고, 서하(
西夏)와 요(
遼, 916~1125)의 동맹을 우려한 송(
宋)은 이를 받아들였다. 1044년 서하(
西夏)와 송(
宋)은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서하(
西夏)가 송(
宋)에 신하의 예를 취하는 대신 서하(
西夏)의 황제는 하국왕(
夏國王)에 봉해졌다. 그리고 송(
宋)은 매년 은(
銀) 7만2천냥, 비단 15만3000필, 차 5만근을 서하(
西夏)에 지급하고, 국경에 무역장을 개설해 교역을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당시 송(
宋)의 연호(
年號)를 따서 ‘경력(
慶曆)의 화약(
和約)’이라고 한다.
그 뒤 서하(
西夏)는
비단길을 통한 동서 교역을 매개하며 무역의 이익을 독점하며 크게 세력을 넓혔다. 그리고 송(
宋)과 활발히 교역하며 농경과 유목, 한족(
漢族) 문화와 탕구트(Tangut) 고유 문화가 결합된 수준 높은 문화를 발전시켰다.
닝샤후이족자치구[
寧夏回族自治區]의 인촨[
銀川] 서쪽의 허란산[
賀蘭山] 기슭에서 발견된
서하(西夏) 왕릉에는 9개의
황제릉을 포함해 250여 개의 묘지가 분포해 있는데, 서하(
西夏) 문화의 특징을 알려주는 수많은 유물과 부장물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서하왕릉의 능탑(
陵塔)은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불릴 정도로 웅장하면서도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또한 서하(
西夏)는 불교가 발달해 카라호토(
黑水城, Kara Khoto)와 둔황[
敦煌] 일대에 회화와 탑 등의
불교 미술 작품들을 남겼다. 불교를 국교화하여 국가에 화상공덕사(
和尙功德司), 출가공덕사(
出家功德司)라는 관청을 설치했고, 각지에 절이나 탑을 세우고 불교 경전을 서하어로 번역하여 보급했다.
서하(
西夏)는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를 사용했는데,
탕구트어라고도 부르는 서하어(
西夏語)는 티베트-
미얀마어 계통에 속하며, 1036년에 공포된 서하문자(
西夏文字)는 한자(
漢字)와 유사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서하문자(
西夏文字)로 <논어(
論語)>, <
맹자(
孟子)>, <손자병법(
孫子兵法)> 등의 서적이나 불경을 서하어로 번역하였고, <신집금쇄장치문(
新集金碎掌置文)>, <신집금합도(
新集錦合道)> 등의 문학 작품도 전해진다. 그리고 인쇄국(
印刷局)인 각자사(
刻字司)를 두어 문자 보급을 위해 단어집(
單語集)이나 음운조직(
音韻組織)을 정리한 운서(
韻書) 등의 서적을 출판하였다. 때문에 서하문자(
西夏文字)는 오늘날에 와서 그 발음이나 의미가 대부분 파악되고 있으며, 서하어의 언어적
계통도 밝혀지고 있다.
서하(
西夏)는 건국 초기에는
송(宋)의 관제(官制)를 모방하였으나 점차 독자적인 체제로 정비하였다. 현재까지 서하어(
西夏語)로 쓰여진 <천성구개신정금령(
天盛舊改新定禁令)>(1149), <광정임신신법(
光定壬申新法)>(1212), <저년신법(
猪年新法)>(1215) 등의 법전이 전해진다. 관직은 문관, 무관 모두 상사(
上司)·중사(
中司)·하사(
下司)의 3등급으로 나누었고, 지방행정체제는 분명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4부(
府), 11주(
州), 7군(
郡), 6현(
縣), 8진(
鎭) 등을 설치하여 통치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서하(
西夏)는 경종(
景宗, 재위 1038~1048) 이원호(
李元昊)에서 말제(
末帝, 재위 1226~1227) 이현(
李晛)까지 10대에 걸쳐 지속되었지만, 7대째인 양종(
襄宗, 1206~1211) 이안전(
李安全) 때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군에 점령되면서 몽골[
蒙古]에 복속되었다. 1206년 몽골[
蒙古]을 통일한 칭기즈칸은
유목민 부족을 재편하고, 1207년 서하(
西夏)를 침입하여 점령하였다. 서하(
西夏)는 몽골에게 복속을 약속하고 황제의 딸을 칭기즈칸과 혼인시켰다. 그리고 몽골과 함께 금(
金, 1115∼1234)을 공격하여 전쟁을 벌였다. 금(
金)과의 오랜 전쟁으로 서하(
西夏)의 국력은 급속히 쇠퇴했으며, 1226년에는 칭기즈칸의 서정(
西征) 참가를 거부하여 다시 몽골의 침입을 받았다. 결국 1227년 칭기즈칸이 직접 이끈 몽골군에게 점령되어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