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목보의 변 (土木-變,1449)        1400 ~ 1500  2009. 4. 27.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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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정통제

토목의 변(土木之變) 또는 토목보의 변(土木堡之變)은 명나라 정통제 14년(1449년)에 발생한 명나라와 몽골 부족을 통일한 오이라트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명나라 정통제는 친정을 하다가 오이라트의 포로로 잡혔다.

 1449년에는 몽골계 부족인 오이라트(Oirāt)가 세력을 형성하고 무역의 확장을 위해 명과 교섭하였으나 여러 차례 결렬되었다.

1406년 영락제는 몽골 부족들에게 조공무역을 허락하였는데, 마시(馬市)라는 형태로 교역을 하여 영종까지 관례화되었다. 명나라는 이들로부터 말과 가축 등 그 부산물을 수입하고, 비단 등의 의류와 식량 등을 수출하였다. 처음에는 50명 정도의 사절단 규모가 에센 때에 이르러 3,000명까지 늘어났고, 주변 위구르의 상인들까지 가세하여 무역량이 늘어나고 밀무역도 성행하였다.

이에 심각한 문제를 겪던 명나라는 오이라트 부족에 대한 무역을 제한하였고 1448년 사례감 왕진은 실제 인원에 대한 조공무역만 허용했으며, 말 값도 오이라트가 제시한 가격의 20%만 지급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오이라트의 군주인 에센 칸은 정통제 14년(1449년)에 2만의 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명나라를 침입하였다. 

 명나라 정통제는 오이라트족을 친정하고자 50만의 군대를 이끌고 북진하여 군대의 규모를 과시하였다.

명나라의 황제인 주기진(정통제)은 50만 대군을 이끌고 에센칸에게 덤벼들었으나 토목보에서 기습공격이 성공하여 6일 동안 치열하게 싸운 끝에 명군은 30만이 넘게 전사했으며 왕진을 비롯하여 명나라의 장군 전원이 살해당하고 정통제 주기진과 나머지 명군은 포로가 되었다.

 명나라군의 패전소식은 명나라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고, 수도를 북경(베이징)에서 남경 천도설이 나왔지만 병부시랑 우겸(于謙)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멸망한 송(宋,960 ~ 1279)의 예를 못보았느냐며 북경은 천리이므로 사수하여야 한다" 라고 강력히 주장하여 조정을 안정시켰다.

한편 에센족은 명군의 수급로를 차단하고 연승하였으며, 결국 에센군은 토목보(土木堡)를 포위하여 명나라 정통제를 잡아갔다.

황제를 포로로 잡아간 에센족은 전세의 유리함을 알고, 명과의 교섭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북경 조정은 정통제의 이복동생인 주기옥(朱祁鈺)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니 경태제이다.

경태제가 황제로 즉위한 후 정통제를 폐위하고 감금하였으나 충신들이 정통제를 복위시키고 경태제를 옹립하려던 우겸(于謙) 등 수십명의 명나라 중신들이 저잣거리에서 모두 공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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