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데냐 왕국 [Regno di Sardegna]        1600 ~ 1700  2009. 4. 28.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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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멸망이후 이탈리아 반도를 마침내 통일 시킨 왕조. 비록 현재의 이탈리아를 주구성하고 있는 롬바르드족이었지만 이탈리아 반도가 단일국가로 통합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탈리아 왕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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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데냐 왕국 [Regno di Sardegna]
요약
토리노를 수도로 한 북이탈리아의 소왕국.
본문

이 왕국의 기초를 닦은 사보이가()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에스파냐계승전쟁에 참가, 위트레흐트조약에 의해 시칠리아롬바르디아의 일부를 획득하고 1713년 이후 시칠리아왕으로 불리었다. 1718년에는 시칠리아를 사르데냐와 교환하여 사보이·피에몬테와 롬바르디아의 일부, 그리고 사르데냐에 걸치는 사르데냐왕국을 성립시켜, 외국 지배하에 있던 이탈리아 나라들 중에서 자립적() 국가의 지위를 굳혔다.

프랑스혁명나폴레옹의 진출로 사르데냐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잃었으나, 빈회의의 결과로 구()영토를 회복하고, 구()제노바공화국을 병합하였다. 1831년 카를로 알베르토가 즉위하여 이탈리아를 오스트리아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려는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다.

1848∼1849년의 대()오스트리아전쟁은 실패하였으나, 그의 아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수상() 카부르의 지도 아래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이 되었다. 1861년에는 마침내 통일을 이룩하고 에마누엘레 2세가 이탈리아왕에 즉위함으로써 사르데냐왕국은 소멸되었다.

요약
토리노를 수도로 했던 북이탈리아의 영방국가.
설명
토리노를 수도로 했던 북이탈리아의 영방국가(領邦國家, 1720∼1861). 사부아(사보이아)·피에몬테·니구리아·사르데냐섬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왕가는 중세 사부아지방에서 일어난 사보이아가인데, 뒤에 북이탈리아로 영토를 확대하고 15세기부터 사보이아공국(公國)이라고 하였다. 공국은 17세기 전반부터 프랑스의 위성국이었으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공위 1675∼1720, 초대 사르데냐왕 재위 1720∼30)는 프랑스와 반(反)프랑스대동맹 사이에서 교묘하게 대처하여, 1697년 프랑스에게 잃었던 땅을 되찾고 독립에 성공하였다. 이어 에스파냐 왕위 계승전쟁에서도 대프랑스의 국제관계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하여, 1713년 북이탈리아의 영토와 시칠리아 및 왕위를 획득했다. 그 뒤 오스트리아에 시칠리아를 양도하고, 대신 사르데냐를 얻음으로써 1720년 사르데냐왕국이 탄생했다. 왕국의 초대 임금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2대째의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재위 1730∼73)는 국내외 정치에 주목할 만한 성과를 올리고 프랑스절대주의를 본보기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의 기초를 쌓았다. 즉, 농업과 교육의 개선, 형법과 민법의 통일, 행정개혁, 귀족과 성직자의 봉건적 특권의 제한 등이다. 특히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는 국외정치에서 선왕의 예에 따라 폴란드계승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 참가해서, 항상 승자쪽에 서면서 롬바르디아지방에 영토를 넓혔다. 또한 본토와 사르데냐의 경제발전에 힘쓰면서 특히 직물공업을 육성시켰다. 그러나 다음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재위 1773∼96)의 치세 아래서 프랑스혁명군의 침입 결과, 정치적·군사적 붕괴 위기를 맞고, 1796년 파리화약에 의해서 사부아·니스의 양도와 피에몬테의 점령을 강요당했다. 1800년 마렝고 전투 뒤에, 피에몬테는 프랑스에 합병되고, 왕가는 영국의 보호를 받으며 사르데냐성으로 피난했다. 1814년 나폴레옹 1세의 몰락과 함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재위 1802∼21)는 피에몬테로 귀환하고, 이듬해 빈회의는 사부아의 일부를 제외한 모든 옛 영토와 옛 제노바공화국령을 사르데냐왕국에 귀속시켰다. 그러나 왕은 나폴레옹 1세에 의해서 도입된 질서의 완전한 철회와 반동적 복고정책을 실행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1821년 피에몬테에서 자유주의혁명이 일어나, 헌법제정을 요구하였다. 이 압력에 굴복해서 왕은 퇴위하고, 모데나에 있던 왕의 동생 카를로 페리체에게 양위(讓位)하였으나, 카를로 페리체가 즉위할 때까지 카를로 알베르토가 섭정(攝政)하였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헌법제정을 약속하였으나 그 뒤 귀국한 카를로 페리체는 이 약속을 부인하고 오스트리아군의 원조를 받아 혁명세력을 진압했다. 카를로 페리체에 이어 즉위한 카를로 알베르토(재위 1831∼49)는 정통주의자로서 자유주의운동과 마치니운동을 탄압했으나, 농업을 중심으로 경제의 근대적 개혁을 점차 추진시켜, 왕국의 통치를 담당하게 되는 시민계급의 형성을 촉진시켰다. 1848년 2월 파리에서 일어난 혁명은 다음 달 빈에 파급되고, 밀라노에서는 반오스트리아 반란이 발생했다. 이미 헌법을 발포하고 있던 카를로 알베르토는 국민의 반오스트리아적 기운(機運)에 압도되어 대오스트리아전쟁을 시작했지만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의 반격 앞에 굴복했다. 이듬해 봄에 재개된 대오스트리아전쟁도 실패로 끝나 왕은 퇴위했다. 그러나 아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재위 1849∼61, 초대 이탈리아왕 재위 1861∼78)는 재상 C.B. 카보우르의 원조를 얻어, 1861년 사르데냐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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