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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 [John Locke, 1632.8.29~1704.10.28]
요약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로 계몽철학 및 경험론철학의 원조로 일컬어진다.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졌고 반스콜라적이었으며 《인간오성론》등의 유명한 저서를 남겼다.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 소질을 본성에 따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적 영국
활동분야 철학
출생지 영국 링턴
주요저서 《인간오성론》(1690)
본문

브리스틀 근교의 링턴 출생. 계몽철학 및 경험론철학의 원조로 일컬어진다. 아버지는 소지주 ·법률가로서 내란 때는 의회군에 참가하여 왕당군과 싸웠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 ·자연과학 ·의학 등을 배웠고, 한때 공사(使)의 비서관이 되어 독일 체류 중에 애슐리경(뒤의 샤프츠베리 백작)을 알게 되어 그의 시의() 및 아들의 교사 그리고 고문이 되었다. 백작이 실각되자 반역죄로 몰려, 1683년 네덜란드로 망명했다가, 1689년 사면되어 귀국하였다. 망명생활 동안 각지를 전전하면서 여러 학자들과 친교를 맺고, 귀국 후 《종교 관용에 관한 서한》(1689) 《제2서한》(1690) 《제3서한》(1692) 《통치이론》(1690) 《인간오성론()》(1690) 등을 간행하여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 후 관직에 있었으나 1700년 이후 은퇴하여 에식스의 오츠에서 사망하였다.

데카르트 철학과 I.뉴턴에 의해 완성된 당시의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졌고 반()스콜라적이었다. 《인간오성론》은 그의 영향을 바탕으로 G.버클리, D.흄에게로 계승되었던 경험론과 내재적 현상론()의 입장에서, I.칸트에 이르러 결실을 보게 되는 인식을 근본 과제로 제기하여 논술한 저서이다.

제1권에서는, 먼저 R.데카르트나 케임브리지 플라톤파()의 본유관념()과 원리를 부정하고, 그 위에 제2권에서는, 인지()는 모두 감각과 반성이라는 경험을 통하여 얻어지는 단순관념에 유래하며, 그로부터의 복합관념으로 설명된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전통적인 ‘실체()’ 개념도 단순관념의 복합이며, 기체()는 그 배후에 상정되는 불가지()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단, 색() ·향() ·음()과 같이 감각에 대하여 상대적인 제2성질과, 연장() ·운동 ·고체성()과 같이 물() 자체에 구비된 제1성질과 구별하여, 전자()는 후자가 감각기관에 자극을 줌으로써 생긴다고 생각하여, 당시의 과학적 실재론을 전제로 삼았다. 또, 불가지인 물적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정신에 대해서도 반성의 관념과 기능적 인격에 의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 정신실체나 신의 존재를 인정한 점에서, 그 문제를 다음의 버클리와 흄에게 남겨 놓았다.

제3권의 언어론은, 스콜라적 실체형상()의 비판, 개념론 또는 유명론적()인 보편개념의 설명 ·정의에 대해서의 견해 등 현대 의미론()에 통하는 중요한 고찰을 포함시켰다. 제4권은 제3권까지 논술한 것들을 바탕으로 하여 지식의 확실성 ·가능성 ·종류 등을 논했다. 제4권에서 자아의 직각지()를 지식의 근원으로 하는 것 등 이성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으나, 지식을 관념과 대상 간이 아니라 관념간의 일치 또는 불일치의 지각()이라는, 관념간의 관계라고 한 것은 후의 경험론의 방향을 보인 것이다.

그에게는 《인간오성론》에서 단편적으로 취급된 이외에는 정리된 윤리서()는 없다. 그러나 도덕의 심리적 해명 방법이나 쾌락주의 ·행복주의의 경향과, 도덕을 신()의 법, 자연법, 국법과의 일치에서 구하려고 한 방향 등은 영국 고유의 윤리와 공통된 성격을 보인다. 또, 계시()의 뜻을 인정하면서도 이성적 논증()의 한계를 넘는 것을 개연적()이라 생각하는 점에서 종교상 이신론()을 조장하는 입장에 섰다.

법 ·정치 사상에서는 계약설을 취하지만, 홉스의 전제주의()를 자연상태보다도 더 나쁘다고 생각하여 주권재민()과 국민의 반항권을 인정하여 대표제에 의한 민주주의, 입법권집행권의 분립, 이성적인 법에 따른 통치와 개인의 자유·인권과의 양립 등을 강조하여 종교적 관용을 역설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명예혁명을 대변하고 프랑스혁명이나 아메리카 독립 등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서구(西) 민주주의의 근본 사상이 되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정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유럽 문명과 아메리카 인디언의 원시적 사회를 비교하는 등 서구 중심주의로 치우친 면이 있다.

교육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시의 교육법을 통렬히 비판하여 그리스 ·라틴어 집중주의, 암기식 주입주의를 반대하고 수학적 추리와 유용한 실제적 지식, 신체 ·덕성의 단련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그 사람의 소질을 본성에 따라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역설하여 가정교사에 의한 교육을 주장했다. 저서로 《금리저하와 화폐가치와 화폐가치 앙등의 결과에 관한 고찰》(1691) 《교육론》(1693) 등이 있다.


로크 (John Locke 1632∼1704)

요약
영국의 대표적 철학자. 근대민주주의의 대표적 사상가.
설명
영국의 대표적 철학자. 근대민주주의의 대표적 사상가. 명예혁명기의 시민사회관을 제창한 자유주의자이며 경험론적 인식론의 창시자이다. 브리스틀 근교 링턴에서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출생하여 옥스퍼드대학에서 의학과 철학을 배웠다. 1666년 샤프츠베리의 시의(侍醫) 겸 가정교사가 된 후 그의 신임을 얻어 정치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명예혁명 직전에는 왕당파의 박해로 쿠퍼와 함께 네덜란드에 망명하여 《정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 1690)》 및 《인간오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690)》을 저술하였다. 로크는 지식을 확립하기에 앞서 지식을 만드는 능력인 오성(悟性)이 무엇을 다루는 데 적합한 것인가를 음미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스콜라학파와 데카르트의 본유관념(本有觀念)을 부인하는 동시에, 우리가 현재 품고 있는 모든 경험적·심리적 관념의 발생 기원을 탐구하는 경험론(經驗論)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갖는 이들 관념 상호간의 일치·불일치·결합·배반작용을 지각하는 것을 가리켜 인식(認識)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결과를 지식이라고 하며 관념이 서로 정당하게 결합 또는 분리한 것을 진리라고 하였다. 한편 정치적인 면에서는 시민적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개인적 자유와 종교적 관용의 교리(敎理)를 강력히 옹호하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어 절대왕정을 반박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신으로부터 평등한 자기보존권, 즉 자연권을 부여받았으므로 왕정에 의하여 자연권이 유린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평등한 자기보존권을 주장한 점에서 홉스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통치권을 법률로 창설하는 입법권, 그 법률을 집행하는 집행권, 외정(外政)을 맡아보는 연맹 또는 동맹권을 분립시켜 <3권 분립>을 역설하였다. 또한 정부에 대한 거부권의 행사와 혁명을 일으킬 권리를 인정하여 명예혁명의 도덕적 정당성을 옹호하였다. 이러한 로크의 민주주의적 사상은 몽테스키외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사회계약설>은 J.J. 루소에 의해 철저화되었다. 또 미국의 독립선언과 영국의 공리주의(功利主義)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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