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 (영국 르네상스 과학자 1642.12.25~1727.3.31) 1600 ~ 1700 2009. 4. 28.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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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칼릴레이와 더불어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과학자. 유럽의 과학이 중세 어둠에서 벗어나 얼마만에 깨어났는가. 성장하면서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한다. -------------------------- 뉴턴 [Isaac Newton, 1643.1.4 (1642.12.25~1727.3.31 (1727.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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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물리학자·수학자·천문학자. 자연철학자로서, 막대한 신학·연금술의 논고·유고도 있기 때문에 신학자 또는 최후의 연금술사로 불리기도 한다.
생애
잉글랜드 동부 링컨셔의 울스소프에서 태어나 그랜섬의 킹스스쿨에서 공부하고, 1661년 6월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1665년 학사학위를, 1668년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케임브리지시절의 뉴턴은 염세적이었다고 전한다. 그러한 그의 태도는 해외무역과 상업이 성해지고 대학의 역할이 변화하기 시작하는 시대에, 구태의연한 연공서열적인 학내 인사가 횡행하고 퇴폐적 생활에 빠진 교사와 학생이 적지 않아, 대학에 대한 청교도적인 반항과도 같았다. 1669년 스승인 I. 배로의 루카스교수직을 이어받아 수학을 강의했다. 1668년, 1671년에 반사망원경을 제작했으며, 1672년 왕립협회 회원이 되었다. 1686년 국왕이 대학의 규정을 침해하고 베네딕토파의 신부 프란시스에게 학위를 주어 케임브리지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 하자, 이것에 저항하는 대학 전권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 결국 국왕을 패배시겼다. 1688년 프란시스 사건에서의 굳은 자세를 인정받아 대학대표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1년간 런던에 체재했다. 이 때 J. 로크와 S. 페피스, 정부고관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행정직을 구하려 했지만, 토리당의 시대였기 때문에 휘그당이었던 뉴턴에게는 적당한 자리가 없었다. 1693년 《프린키피아》의 출판(1687) 후의 허탈감과 반삼위일체설의 논문 집필(1690)의 긴장 등으로 뉴턴은 우울상태에 빠졌다. 1696년 친구인 C. 몬터규의 도움으로 조폐국감사로 취임, 1699년 조폐국장이 되었다. 위조화폐를 단속하며 핼리, 로크와 함께 몬터규의 화폐 재주조사업을 도왔다. 1700년에는 화폐 중량의 엄격한 정확성을 구하여 1717년에 정부에 건의 1기니 금화가 은 21실링으로 결정됨으로서 영국은 실질적으로 금본위제로 되었다. 그러므로 뉴턴은 영국화폐제도사에도 이름을 남겼다. 1701년 10월 루카스교수직, 트리니티 칼리지의 이사직을 사임했다. 같은 해 케임브리지대학 선출 국회의원, 1703년 왕립협회 회장에 선출되어 죽을 때까지 그 지위에 있었다. 1705년 작위를 받고, 1710년 그리니치천문대 감찰위원장에 취임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고, 1727년 런던교외의 켄싱턴에서 죽었다. 신앙에 관해서는 국교와 입장을 달리하여, 유니테어리언으로서의 신앙을 가졌다.
과학상의 업적
과학상의 업적은 3개의 대발견이라 불리는 빛의 스펙트럼, 만유인력의 법칙, 미적분법과 3가지의 새로운 운동법칙을 발견하였고, 그랜섬시대부터 화학과 연금술에 흥미를 가져 여러 합금을 만들었으며, 열의 냉각법칙(1701) 등 광범위한 분야를 연구했다.
광학
1663년경 케플러나 데카르트의 《굴절광학》을 공부하여 렌즈·프리즘·거울·망원경·현미경 등 광학 연구용의 기구를 수집했다. 1665∼1666년, 렌즈의 연마법, 비구면유리의 제작 등 광학실험의 기초적 기술을 습득하여 1666년 최초의 프리즘실험을 했다. 이것은 망원경 개량의 기초연구로 이미 알려진 구면수차의 제거를 목표로 비구면 유리를 제작하였고, 또한 색수차가 상 흐림의 원인인 것을 발견, 그 원인구명을 위해 빛의 굴절에 따라 생기는 빛의 분산을 연구했다. 그 결과로 뉴턴은 백색광(태양광)은 굴절률이 다른 단색광의 복합으로 이루어졌다고 결론짓고, 이 때문에 색수차의 제거는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그릇된 단정을 내려, 굴절망원경의 개량에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것에서 J. 그레고리와 카스그랭 등이 착상했던 반사망원경을 제작, 1668년에 길이 15㎝, 배율 약 40배의 제1호를 완성시켰다(현존하지 않는다). 1671년 더 개량된 구경 5㎝, 38배의 제2호를 완성해 왕립협회에 제출했다(왕립협회에 현존). 또 좁은 간극(間隙)에 의한 빛의 회절, 박막에 의한 빛의 간섭현상을 연구했다. 이 연구는 1672∼1675년 R. 훅과의 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또 <뉴턴의 원무늬>로 알려진 간섭무늬 실험에서 밝고 어두운 동심원 모양의 원무늬를 관찰했다. 18세기 말의 빛의 입자론, 19세기 전반에 확립된 파동론의 입장에서 뉴턴을 입자론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빛의 분명한 직진성 때문에 파동성을 부정하였지만, 그 밖에는 입자론적 설명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빛의 본성을 설명하기 위해, 정량적 방법을 모색했다.
수학
수학연구는 광학연구와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다. 1665년 무한소의 개념에 기초하여 미분법을 발견하고 유율법(流率法)의 개념을 확립했다. 1669년 《무한급수의 방정식에 의한 해석에 관하여》를, 1671년 《유율법과 무한급수》를 저술했다. 1705년 이후, 베를린과학아카데미 초대 회장 라이프니츠와 왕립협회 회장이었던 뉴턴의 미적분법에 관한 우선권논쟁이 있었지만, 1716년 라이프니츠의 죽음으로 논쟁은 끝났다. 뉴턴은 케임브리지 학생시절에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등 여러 수학자들의 논문집으로 수학을 공부, 이항정리의 연구에서 무한급수의 연구로 나아가 유율법을 착상했다 한다.
역학
이 분야의 기본적 구상이 생긴 시기는 런던에 페스트가 유행하던 1665∼1668년, 약 2년 동안 고향에 피신했던 때이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설은 고향 농장에서의 일이라고 추측되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이 말의 출처는 뉴턴의 전기작가 W. 스투켈리에게 뉴턴이 말했던 것이라고도 하고, 《프린키피아》를 프랑스에 소개한 볼테르라고도 한다. 뉴턴의 동역학연구는 1664년경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갈릴레이의 《신과학대화》 등의 연구에서 시작되었다. 데카르트·호이겐스·랜·훅 등에 의해 확립된 탄성충돌론의 성과에 따라 비탄성충돌의 이론적 연구로 나아갔으며, 계속하여 구에 내접하는 다각형의 각 꼭지점에서 반발하는 운동의 극한으로서 원운동을 들어 원심력의 이해로 나아가, 이들과 케플러의 제3법칙을 결합하여 역제곱법칙의 도출에 성공했다.
뉴턴의 시대
매뉴팩처의 전 시대를 통해 기술상의 주요 과제는 기계적인 문제였다. 예를 들어 수상수송의 영역에서 선박의 적재량·속도·안정항행·조타성능·운하망·수문정비 등의 과제는 부력을 비롯하여 저항매질 중에서의 물체의 운동 법칙과 조석현상의 해명을 필요로 하여, 유체의 유출, 물의 압력, 유출속도와의 관계 등 유체정역학·동역학적 연구를 촉진시켰다. 수차나 풍차 등 자연력의 이용은 역학적 현상을 대상화하여 인간의 근육력과 등가의 관계를, 즉 인간노동을 작업량으로 정량하여, 자연의 모든 힘을 비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군사적 영역에서 포탄과 화기는 물체의 자유낙하, 포물체운동, 작용·반작용 그리고 충돌문제를, 기계와 토목건축용 자재는 재료역학상의 문제를 제기하여 레오나르도 다 빈치 시대 이후 이러한 과제에 대한 연구성과가 축적되었다. 이들을 총집한 것으로서 천체와 지상 역학의 통일적 체계화가 가능하게 되었던 시대, 이것이 뉴턴역학의 출현을 준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뉴턴은 신에 순종하여 교회와 타협하려 함으로써, 그가 입각해 있는 사회를 옹호하는 입장이 선명해졌고, 그 시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생애
잉글랜드 동부 링컨셔의 울스소프에서 태어나 그랜섬의 킹스스쿨에서 공부하고, 1661년 6월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1665년 학사학위를, 1668년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케임브리지시절의 뉴턴은 염세적이었다고 전한다. 그러한 그의 태도는 해외무역과 상업이 성해지고 대학의 역할이 변화하기 시작하는 시대에, 구태의연한 연공서열적인 학내 인사가 횡행하고 퇴폐적 생활에 빠진 교사와 학생이 적지 않아, 대학에 대한 청교도적인 반항과도 같았다. 1669년 스승인 I. 배로의 루카스교수직을 이어받아 수학을 강의했다. 1668년, 1671년에 반사망원경을 제작했으며, 1672년 왕립협회 회원이 되었다. 1686년 국왕이 대학의 규정을 침해하고 베네딕토파의 신부 프란시스에게 학위를 주어 케임브리지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 하자, 이것에 저항하는 대학 전권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 결국 국왕을 패배시겼다. 1688년 프란시스 사건에서의 굳은 자세를 인정받아 대학대표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1년간 런던에 체재했다. 이 때 J. 로크와 S. 페피스, 정부고관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행정직을 구하려 했지만, 토리당의 시대였기 때문에 휘그당이었던 뉴턴에게는 적당한 자리가 없었다. 1693년 《프린키피아》의 출판(1687) 후의 허탈감과 반삼위일체설의 논문 집필(1690)의 긴장 등으로 뉴턴은 우울상태에 빠졌다. 1696년 친구인 C. 몬터규의 도움으로 조폐국감사로 취임, 1699년 조폐국장이 되었다. 위조화폐를 단속하며 핼리, 로크와 함께 몬터규의 화폐 재주조사업을 도왔다. 1700년에는 화폐 중량의 엄격한 정확성을 구하여 1717년에 정부에 건의 1기니 금화가 은 21실링으로 결정됨으로서 영국은 실질적으로 금본위제로 되었다. 그러므로 뉴턴은 영국화폐제도사에도 이름을 남겼다. 1701년 10월 루카스교수직, 트리니티 칼리지의 이사직을 사임했다. 같은 해 케임브리지대학 선출 국회의원, 1703년 왕립협회 회장에 선출되어 죽을 때까지 그 지위에 있었다. 1705년 작위를 받고, 1710년 그리니치천문대 감찰위원장에 취임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고, 1727년 런던교외의 켄싱턴에서 죽었다. 신앙에 관해서는 국교와 입장을 달리하여, 유니테어리언으로서의 신앙을 가졌다.
과학상의 업적
과학상의 업적은 3개의 대발견이라 불리는 빛의 스펙트럼, 만유인력의 법칙, 미적분법과 3가지의 새로운 운동법칙을 발견하였고, 그랜섬시대부터 화학과 연금술에 흥미를 가져 여러 합금을 만들었으며, 열의 냉각법칙(1701) 등 광범위한 분야를 연구했다.
광학
1663년경 케플러나 데카르트의 《굴절광학》을 공부하여 렌즈·프리즘·거울·망원경·현미경 등 광학 연구용의 기구를 수집했다. 1665∼1666년, 렌즈의 연마법, 비구면유리의 제작 등 광학실험의 기초적 기술을 습득하여 1666년 최초의 프리즘실험을 했다. 이것은 망원경 개량의 기초연구로 이미 알려진 구면수차의 제거를 목표로 비구면 유리를 제작하였고, 또한 색수차가 상 흐림의 원인인 것을 발견, 그 원인구명을 위해 빛의 굴절에 따라 생기는 빛의 분산을 연구했다. 그 결과로 뉴턴은 백색광(태양광)은 굴절률이 다른 단색광의 복합으로 이루어졌다고 결론짓고, 이 때문에 색수차의 제거는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그릇된 단정을 내려, 굴절망원경의 개량에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것에서 J. 그레고리와 카스그랭 등이 착상했던 반사망원경을 제작, 1668년에 길이 15㎝, 배율 약 40배의 제1호를 완성시켰다(현존하지 않는다). 1671년 더 개량된 구경 5㎝, 38배의 제2호를 완성해 왕립협회에 제출했다(왕립협회에 현존). 또 좁은 간극(間隙)에 의한 빛의 회절, 박막에 의한 빛의 간섭현상을 연구했다. 이 연구는 1672∼1675년 R. 훅과의 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또 <뉴턴의 원무늬>로 알려진 간섭무늬 실험에서 밝고 어두운 동심원 모양의 원무늬를 관찰했다. 18세기 말의 빛의 입자론, 19세기 전반에 확립된 파동론의 입장에서 뉴턴을 입자론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빛의 분명한 직진성 때문에 파동성을 부정하였지만, 그 밖에는 입자론적 설명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빛의 본성을 설명하기 위해, 정량적 방법을 모색했다.
수학
수학연구는 광학연구와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다. 1665년 무한소의 개념에 기초하여 미분법을 발견하고 유율법(流率法)의 개념을 확립했다. 1669년 《무한급수의 방정식에 의한 해석에 관하여》를, 1671년 《유율법과 무한급수》를 저술했다. 1705년 이후, 베를린과학아카데미 초대 회장 라이프니츠와 왕립협회 회장이었던 뉴턴의 미적분법에 관한 우선권논쟁이 있었지만, 1716년 라이프니츠의 죽음으로 논쟁은 끝났다. 뉴턴은 케임브리지 학생시절에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등 여러 수학자들의 논문집으로 수학을 공부, 이항정리의 연구에서 무한급수의 연구로 나아가 유율법을 착상했다 한다.
역학
이 분야의 기본적 구상이 생긴 시기는 런던에 페스트가 유행하던 1665∼1668년, 약 2년 동안 고향에 피신했던 때이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설은 고향 농장에서의 일이라고 추측되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이 말의 출처는 뉴턴의 전기작가 W. 스투켈리에게 뉴턴이 말했던 것이라고도 하고, 《프린키피아》를 프랑스에 소개한 볼테르라고도 한다. 뉴턴의 동역학연구는 1664년경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갈릴레이의 《신과학대화》 등의 연구에서 시작되었다. 데카르트·호이겐스·랜·훅 등에 의해 확립된 탄성충돌론의 성과에 따라 비탄성충돌의 이론적 연구로 나아갔으며, 계속하여 구에 내접하는 다각형의 각 꼭지점에서 반발하는 운동의 극한으로서 원운동을 들어 원심력의 이해로 나아가, 이들과 케플러의 제3법칙을 결합하여 역제곱법칙의 도출에 성공했다.
뉴턴의 시대
매뉴팩처의 전 시대를 통해 기술상의 주요 과제는 기계적인 문제였다. 예를 들어 수상수송의 영역에서 선박의 적재량·속도·안정항행·조타성능·운하망·수문정비 등의 과제는 부력을 비롯하여 저항매질 중에서의 물체의 운동 법칙과 조석현상의 해명을 필요로 하여, 유체의 유출, 물의 압력, 유출속도와의 관계 등 유체정역학·동역학적 연구를 촉진시켰다. 수차나 풍차 등 자연력의 이용은 역학적 현상을 대상화하여 인간의 근육력과 등가의 관계를, 즉 인간노동을 작업량으로 정량하여, 자연의 모든 힘을 비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군사적 영역에서 포탄과 화기는 물체의 자유낙하, 포물체운동, 작용·반작용 그리고 충돌문제를, 기계와 토목건축용 자재는 재료역학상의 문제를 제기하여 레오나르도 다 빈치 시대 이후 이러한 과제에 대한 연구성과가 축적되었다. 이들을 총집한 것으로서 천체와 지상 역학의 통일적 체계화가 가능하게 되었던 시대, 이것이 뉴턴역학의 출현을 준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뉴턴은 신에 순종하여 교회와 타협하려 함으로써, 그가 입각해 있는 사회를 옹호하는 입장이 선명해졌고, 그 시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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