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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 [1694.11.21~1778.5.30]
요약
18세기 프랑스의 작가, 대표적 계몽사상가. 비극작품으로 17세기 고전주의의 계승자로 인정되고, 오늘날《자디그》,《캉디드》 등의 철학소설, 역사 작품이 높이 평가된다. 백과전서 운동을 지원하였다.
원어명 Voltaire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프랑스 파리
주요저서 《자디그》(1747),
팡테옹 / 팡테옹은 국가를 빛낸 인물을 기리는 사당으로 프랑스의 위대한 시인·학자\·정치가 등의 무덤이 있다. 퀴리부인, 볼테르, 루소, 에밀 졸라, 빅토르 위고, 알렉상드르 뒤마, 장 모네, 앙드레 말로, 미라보 등 역대 위인들이 이곳에 묻혀 있다.
본문

본명 Fran??ois-Marie Arouet. 파리 출생. 유복한 공증인의 아들로 예수회 학교 루이 르 그랑에서 공부하였다. 1717년에 오를레앙공()의 섭정()을 비방하는 시를 썼다 하여 투옥되었는데, 비극 《오이디푸스 d’Þdipe》를 옥중에서 완성하고, 1718년에 상연하여 성공을 거둔 다음 볼테르라는 필명으로 바꾸었다. 그 후 한 귀족과의 싸움으로 재차 부당하게 투옥되었으며, 국외망명을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제정치하의 불평등에 환멸을 느끼고 1726년에 영국으로 건너갔으며, 그곳의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면서 타고난 비판정신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 종교전쟁을 끝나게 한 앙리 4세를 찬양하는 서사시 《앙리아드 Henriade》(1728)를 출판한 후, 1729년에 귀국하였으며, 셰익스피어극의 영향을 받은 사상극 《자이르 Zaïre》(1732)를 발표하였다. 이어 《철학서간(영국서간) Lettres philosophiques ou Lettres sur les anglais》(1734)을 통하여 영국을 이상화하고 프랑스 사회를 비판하였기 때문에, 정부의 노여움을 샀다.

그 후 애인 뒤 샤틀레 후작부인의 영지()에서 1734년부터 10년 간을 저술과 연구로 보냈다. 그동안 희곡 《마호메트 Mahomet》(1741) 《메로프 Mérope》(1743), 철학시 《인간론》(1738) 등을 발표하였다. 1744년에 친구의 외무장관 취임과 함께 프랑스 궁정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1746년에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으로 뽑혀 역사 편찬관이 되었으나, 또다시 궁정의 반감을 사서 불우한 나날을 보냈다. 1750년 프로이센프리드리히 2세의 초빙으로 베를린에 가서 역사서 《루이 14세의 세기 Le Siècle de Louis XIV》(1751)를 완성하고 베를린을 떠났다. 그 후 수년 동안 제네바에 머물다가, 1761년에 스위스 국경에 가까운 페르네의 한촌()에 들어갔다.

1778년에는 자작()인 《이렌 Irene》의 상연을 위해 파리에 갔다가 병사하기까지 약 20년 동안 이곳에 정착하였다. 그는 ‘페르네의 장로()’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반봉건 ·반교회 운동의 지도자로서 수많은 공격적 문서를 발표하였는데, 종교적 편견에 의한 부정재판을 규탄한 칼라스 사건(1761) 등의 실천운동도 유명하다. 그 성과인 《관용론() Traité sur la tolérance》(1763)과 세계문명사인 《풍속시론()》(1756), 철학소설 《캉디드 Candide》(1759) 《철학사전 Dictionnaire philosophique portatif》(1764)이 만년의 대표작이다.

볼테르의 생전에는 많은 비극작품으로 17세기 고전주의의 계승자로 인정되었으나, 오늘날에는 간결한 문체의 《자디그 Zadig》(1747)나 《캉디드》 등의 철학소설, 그리고 문명사적 관점에 따른 역사 작품이 더 높이 평가된다. 한편, D.디드로, J.J.루소 등과 함께 백과전서() 운동을 지원하였으며, 백과전서파의 한사람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볼테르 (Voltaire 1694∼1778)

요약
 프랑스 계몽사상가·작가.
설명
프랑스 계몽사상가·작가. 본명은 Francois Marie Arouet. 파리 출생. 예수회 계통의 명문교 루이 르 그랑에서 공부하였다. 재학시절부터 문학분야에서 조숙한 재능을 나타냈다. 아버지는 그를 후계자로 삼을 작정이었으나 문학 쪽으로 깊이 기울었다. 1717년 그 무렵의 섭정 오를레앙공을 야유한 풍자문을 쓴 죄목으로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완성시킨 비극 《에디프(Edipe, 1718)》가 성공을 거두어, 그 뒤부터 볼테르로 필명을 바꾸고 극작의 성공으로 얻은 자금으로 사업에도 투자하였다. 그 무렵 시민계급 출신인 그가 문단에 이름을 떨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한 귀족과 언쟁을 하고, 다시 투옥되었다. 이와 같이 특권계급만 우대받는 프랑스사회를 단념하고, 1726년 그는 스스로의 의지로 <자유의> 나라 영국으로 건너가 2년 7개월간 머물렀다. 그 사이에 W. 셰익스피어 작품을 직접 관람하고 그 무렵의 영국 작가 H. 볼링브로크·A. 포프·J. 스위프트 등과 교류하였다. 또 영국으로 건너간 목적의 하나였던 서사시 《앙리아드(1728)》을 출판하였다.

실레 체재(滯在) 10년
1729년 귀국하자 셰익스피어극의 영향으로 극작 《자이르(1732)》 등을 발표하는 한편, 영국견문기라는 명목으로 프랑스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한 《철학서간(영국서간)》을 간행하였다. 영국을 극단적으로 예찬한 이 책의 진의를 간파한 당국이 즉각 분서(焚書) 처분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볼테르는 애인 뒤 샤틀레부인과 함께 부인의 저택이 있는 실레로 도피, 약 10년간 머물렀다. 그는 이 사이에 뒤에 집필되는 역사작품과 철학콩트를 위한 방대한 독서와 자료수집에 몰두하였다. 실레시절에는 문학작품으로 《이 세상 사람(1736)》, 극작 《마호메트(l741)》 《메로프(1743)》, 철학작품으로 《인간론(1738)》 《뉴턴 철학입문(1738)》 등을 집필하였다. 1745년의 수사관(修史官) 임명에 이어서, 1746년 아카데미 프랑세즈회원이 되었으나 설화사건으로 다시 파리를 떠나게 되었다. 이 무렵 명성과 실의 사이를 오가는 자신을 테마로 한 철학콩트 《자디그(1747)》를 썼다. 애인 뒤 샤틀레 부인의 사후 볼테르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의 초청으로 포츠담으로 가, 그곳에서 역사서 《루이 14세의 세기(1751)》와 철학콩트 《미크로메가스(1751)》를 발표하였으나, 프리드리히 2세와의 불화로 프로이센을 떠났다. 루이 15세와의 불화로 파리에 돌아갈 수 없던 볼테르는 한때 제네바 근교에 주거를 정하지만 자작 연극의 상연을 둘러싸고, 제네바당국과 알력을 일으키는 한편, 1755년 11월 1일에 리스본을 덮친 대지진을 다룬 시로 J.J. 루소와 격렬하게 논쟁하였다. 이 대지진을 계기로 1759년에 G.W. 라이프니츠와 포프의 낙천주의를 야유한 철학콩트를 익명으로 출판하여 대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이것이 볼테르의 최고걸작으로 지목되는 《캉디드(1759)》이다. 그는 철학적으로는 깊은 사상을 표명하지 않았으나, 이 콩트의 명문구 <우리들의 뜰(밭)을 일구지 않으면 안 된다>가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인지(人智)가 미치지 못하는 신의 섭리와 존재에 깊이 들어가는 어리석음을 꾸짖고, 인간정신이 권위와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정신은 문명사로 생각되는 대저작 《풍속사론(1756)》에도 일관되고 있다.

페르네의 장로시대(장로란 동네 어른을 지칭하는 말로서 개신교의 장로와는 무관하다.)
1760년에는 스위스국경에 가까운 페르네에 정착하였다. 근교의 농민에게 호소하여, 농촌개혁에 착수함과 동시에, 빈민구제를 위한 시계공장도 만들었다. 그가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장로의 칭호를 받으면서 자작극을 상연하고, 유럽 각지로부터 문학자·지식인을 맞아들였다. 칼라스사건·시르방사건·바르사건에 날카로운 메스를 가하여 그는 그들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독자적인 조사를 하고, 그 명예회복에 공헌하였다. 이렇게 판명된 여러 사실에 독자적 종교관을 함께 담아 관용의 정신을 역설한 《관용론(1763)》도 이 무렵에 집필하였다. D. 디드로·J.R.L. 달랑베르편(編)의 《백과전서(1751∼72)》에도 처음부터 적지 않은 관심을 나타냈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역사를 중심으로 많은 항목을 집필, 협력하였다. 뒤에 자신이 수정, 편집하여 그 자신의 이상이었던 《철학사전(1764)》을 간행하였다. 오랫동안 대립관계에 있있던 루이 15세의 사후, 파리귀환을 결의한 볼테르는 시민의 열광적인 환영 속에 1778년 2월 1일 파리에 개선하고, 자작희곡 《이렌(1778)》은 코메디프랑세즈에서 상연되었다. 긴 여행의 피로와 연일 대환영이라는 극도의 홍분으로 그해 5월 30일 파리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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