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 출생. 계몽사상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다. 보르도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 파리로 나가서 많은 학자들과 사귀었다. 1714년 보르도 고등법원의 평정관(評定官)을 지내다가 뒤에 원장이 되었다(1716∼1726). 1721년 당시의 프랑스를 풍자적으로 비판한 작품 서간체(書簡體)의 소설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익명으로 출판하였다. 재치 있는 기지(機智)와 기교에 넘친 이 작품은 그를 파리 사교계에서 유명하게 하였다. 그는 곧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어 1728년부터 유럽 각국을 여행하였고 영국에 3년간 체재하였다. 그 동안 각국의 정치 ·경제에 관해 관찰하고, 기록하여 이를 바탕으로 하여 《로마인의 성쇠원인론(盛衰原因論)》(1734) 등을 저술하였고, 또 10여 년이 걸린 대저(大著) 《법의 정신》(1748)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곧 금서목록(禁書目錄)에 올랐으나 2년 동안에 22판(版)을 냈다.
법을 연구하자면 선험적인 이론으로서는 안 되며, 우리들이 생활하고 있는 구체적 현실의 상황에서 출발하여야 한다고 믿은 그는, ‘자유의 거울’인 영국 헌법의 원리를 상세히 분석하였다. 어떤 영국인은 그에게 ‘당신은 우리들 자신보다도 우리들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라고 말하였을 정도이다. 개인의 자유는 국가권력이 사법 ·입법 ·행정의 3권으로 나뉘어 서로 규제 ·견제함으로써 비로소 확보된다고 하는 그의 3권분립의 이론은, 왕정복고(王政復古), 미국의 독립 등에 영향을 주었고, 19세기의 자유주의가 옹호하게 되는 기본적 자유의 규정에 공헌하였다. 흑인에 대한 극도의 편견, 아시아 정치체제에 대한 유럽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면 등이 있기는 하지만, 그 구체적 사회의 분석은 E.뒤르켐의 말처럼 근대의 사회학에 방법과 연구의 영역(領域)을 주었다고 평가받는다. 만년에는 시력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몇 개의 저작에 착수하였으나, 대부분이 그의 생전에는 간행되지 않았고 《여행 노트》 《서간(書簡)》 등은 1941년에 겨우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