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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스키외 [1689.1.18~1755.2.10]
요약
프랑스의 사상가로 보르도 고등법원의 평정관()과 원장을 지냈고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0여 년이 걸린 대저() 《법의 정신》을 저술하였으며 사법 ·입법 ·행정의 3권분립 이론으로 왕정복고()와 미국의 독립 등에 영향을 주었다.
원어명 Baron de La Brède et de Montesquieu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사회사상
출생지 프랑스 보르도
주요저서 《법의 정신》(1748)
몽테스키외 /
본문

보르도 출생. 계몽사상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다. 보르도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 파리로 나가서 많은 학자들과 사귀었다. 1714년 보르도 고등법원의 평정관()을 지내다가 뒤에 원장이 되었다(1716∼1726). 1721년 당시의 프랑스를 풍자적으로 비판한 작품 서간체()의 소설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익명으로 출판하였다. 재치 있는 기지()와 기교에 넘친 이 작품은 그를 파리 사교계에서 유명하게 하였다. 그는 곧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어 1728년부터 유럽 각국을 여행하였고 영국에 3년간 체재하였다. 그 동안 각국의 정치 ·경제에 관해 관찰하고, 기록하여 이를 바탕으로 하여 《로마인의 성쇠원인론()》(1734) 등을 저술하였고, 또 10여 년이 걸린 대저() 《법의 정신》(1748)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곧 금서목록()에 올랐으나 2년 동안에 22판()을 냈다.

법을 연구하자면 선험적인 이론으로서는 안 되며, 우리들이 생활하고 있는 구체적 현실의 상황에서 출발하여야 한다고 믿은 그는, ‘자유의 거울’인 영국 헌법의 원리를 상세히 분석하였다. 어떤 영국인은 그에게 ‘당신은 우리들 자신보다도 우리들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라고 말하였을 정도이다. 개인의 자유는 국가권력이 사법 ·입법 ·행정의 3권으로 나뉘어 서로 규제 ·견제함으로써 비로소 확보된다고 하는 그의 3권분립의 이론은, 왕정복고(), 미국의 독립 등에 영향을 주었고, 19세기의 자유주의가 옹호하게 되는 기본적 자유의 규정에 공헌하였다. 흑인에 대한 극도의 편견, 아시아 정치체제에 대한 유럽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면 등이 있기는 하지만, 그 구체적 사회의 분석은 E.뒤르켐의 말처럼 근대의 사회학에 방법과 연구의 영역()을 주었다고 평가받는다. 만년에는 시력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몇 개의 저작에 착수하였으나, 대부분이 그의 생전에는 간행되지 않았고 《여행 노트》 《서간()》 등은 1941년에 겨우 출판되었다.


프랑스 법학자·정치사상가. 보르도 출생. 일찍이 법률교육을 받았고 1714년 보르도 고등법원의 변호사가 되었다. 1721년에 프랑스를 정치적으로 풍자하는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익명으로 제네바에서 출판해서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거기서 프랑스의 전제정치를 자유주의적 견해로서 철저하게 비판함과 동시에 사제주의도 비판하여, 문학적·사회비판적인 면에서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에 프랑스 아카데미회원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루이 15세가 이를 거절, 1728년 다시 선출되었다. 또한 1728년부터 3년에 걸쳐 오스트리아·이탈리아·헝가리·독일 등 유럽 각국을 여행한 뒤 미국에 머물다가 1731년 파리로 돌아와 유럽 여행과 영국에서의 경험, 그리고 장기간에 걸친 로마사 연구 등을 토대로 해서 《로마흥망원인론(1734)》을 출판했다. 이 책은 로마가 공화제로부터 제국을 거쳐 멸망하기까지의 과정을 마키아벨리의 《로마사론(史論)》에 따라 논술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일생 동안의 연구 결과는 《법의 정신(The Spirit of Laws, 1748)》으로 모아져, 이 책은 법률학의 고전으로서뿐만 아니라 사회학·정치학·지리학 등의 고전으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그의 입헌정치로의 개혁론은 미국헌법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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