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기독교화 되가던 로마제국의 마지막 정통 로마교인 황제. 군사적 재능도 뛰어나서 샤푸르 대제 시절의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도 연전연승하여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크테시폰까지 진격하였으나 급습당하여 전사하고 만다.
--------------------------------------------------

율리아누스 [Flavius Claudius Julianus, 331~363]
요약
로마의 황제(재위 361∼363). 황제로 즉위한 후, 원로원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부활하여 행정을 개혁하고, 그리스도교에 박해를 가하였으며 신플라톤 철학과 미트라교에 의해 이교의 부흥과 개혁을 기도하여, 후세에 ‘배교자’로 불리고 있다.
별칭 배교자()
국적 로마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갈릴리인 공박론()》(362?)
본문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혈연자()이다. 337년 군대의 봉기로 콘스탄티누스 일족이 거의 살해당했을 때, 난을 피하여 337~354년 소아시아니코메디아, 그리고 카파도키아에 있으면서 그리스 고전()을 익혔고, 신플라톤 철학 등에 접하였다. 355년 부제()에 임명되었고, 갈리아에서 싸우기 5년 만에 게르만인을 격퇴하였다. 루테티아(현재의 파리)에서 황제에 추대된 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였다. 즉위한 후에는 원로원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부활하여, 행정을 개혁하고 또 그리스도교에 박해를 가하였으며 신플라톤 철학과 미트라교에 의해 이교()의 부흥과 개혁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363년 사산왕조 페르시아 정벌을 위해 출정 중 부상을 입고 죽었다. 장군으로서의 수완도 뛰어났으나 그 이상으로 그리스도교에 박해를 가하고 이교의 부활을 기도했던 인물로 알려져, 후세에 ‘배교자()’로 불리고 있다. 저작가로도 알려지나 그리스도교를 공격한 《갈릴리인 공박론()》(362?)의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율리아누스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Didius Julianus율리아누스, 최후의 비기독교인 로마 황제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Flavius Claudius Iulianus, 331년 - 363년 6월 26일)는 361년부터 363년까지 로마 황제였다. 콘스탄티누스 왕조.

그는 최후의 이교도(비기독교인) 로마 황제로 무너져가는 제국을 위해 로마의 전통을 부활시켜 개혁하려고 노력하였고 이 때문에 후세의 기독교인으로부터 "배교자 율리아누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목차

[숨기기]

[편집] 생애

[편집] 초기

율리아누스는 331년 비잔티움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동생인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어머니는 그의 두번째 부인 바실리나였다. 그의 친할아버지는 황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고 할머니는 그의 두번째부인이자 막시미아누스의 딸인 테오도라였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자 그 혼란 속에서 콘스탄티누스 일가에 대한 대학살극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율리아누스의 사촌형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자신의 확실한 권력을 위해 뒤에서 조종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테오도라 사이에서 태어난 핏줄은 거의 전부가 몰살을 당했는데 콘스틴티누스 왕가의 핏줄중에서 남은 사람은 딱 5명의 남자뿐이었다. 그 다섯사람은 콘스틴티누스 1세의 아들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삼형제와 율리아누스(당시 6살), 그리고 율리아누스의 사촌인 갈루스(당시 12살)였다.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삼형제에 의해 3등분 되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살아남은 갈루스와 율리아누스에게 엄격한 아리우스 기독교 교육을 시키며 감시했다.

처음에 율리아누스는 비사니아에서 외조모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다. 7살에 니코메디아주교아리우스주의유세비우스에게 교육을 받았고 마드니우스라는 고트족 출신 노예에게 길러졌는데 이 노예는 그리스 고전문화에 정통하여 율리아누스에게 호메로스같은 그리스 고전을 많이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편집] 집권

340년 콘스탄티누스 2세는 그의 동생 콘스탄스와 다투다가 죽었고 이어 350년 콘스탄스도 마그넨티우스에게 죽었다.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마그넨티우스와 대처하는 데 전념하기 위해 율리아누스의 형인 갈루스를 부제(Caesar)에 임명하고 동방을 통치하게 했다.

351년 콘스탄티우스 2세가 마그넨티우스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자 그는 354년 갈루스에게 반역죄를 씌워 처형해 버리고 혼자 제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협이 다가오자 그는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율리아누스를 밀라노로 불러 여동생 헬레나와 결혼시키고 부제로 삼아 제국의 서방을 통치하도록 했다.

처음 부제가 되어서 율리아누스가 맡은 임무는 제국을 침범한 야만족을 격퇴하는 일이었다. 갑자기 부제가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리스 철학에 심취한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갈리아에서 게르만 부족들과의 전투에서 그는 엄청난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었는데 4차례의 원정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의 성공에 위기를 느낀 콘스탄티누스 2세는 자금 지원을 거부하였다.

360년 율리아누스가 갈리아에서 야만족과 대처하고 있을 때 사산조 페르시아샤푸르 2세메소포타미아를 침범해 아미다를 함락시켰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에게 갈리아의 병력을 차출해 동부 전선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율리아누스의 군대의 반감을 가져왔고 그의 군대는 율리아누스를 파리에서 황제(Augustus)로 추대했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격노했다. 같은 해 6월 콘스탄티우스의 군대가 아퀼레이아를 점령하고 이제 두 황제의 부대사이에 내전이 불가피하게 되었는데, 11월 콘스탄티우스 2세가 죽었다. 죽기 직전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가 유일한 황제라는 유언을 남겼고 율리아누스는 정식 황제로 등극했다.

율리아누스는 집권과 동시에 콘스탄티우스의 치세동안의 악정을 단죄했다. 비대해진 황궁의 지출을 대폭 삭감하고 모든 환관을 황궁에서 몰아내었다. 또한 황궁의 사치스러움을 제거하고 노예들과 경비병을 줄여서 황궁생활을 크게 간소화하고 그 비용을 줄였다. 그는 또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모범으로 삼아 철학인 황제로서 통치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하였다.

율리아누스의 기둥 (362년), 앙카라 방문 기념으로 세움(터키,앙카라)

 율리아누스와 종교

362년 2월 4일 율리아누스는 모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포고령을 발표한다. 이 포고령에서 모든 종교는 법앞에서 평등하며 모든 로마의 영토에서 로마 제국이 특정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기독교 공인후 이교를 박해하던 정책을 멈추고 로마가 가진 본래의 종교적 관용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

율리아누스 황제는 이교의 한 여신에게 '로마 사람들이 불경하게 굴었던 과오를 씻어낼 기회를 달라'고 청원하는 내용의, 1만 7천 자나 되는 긴 찬송가를 작사한데 이어 하룻밤 동안에 그것을 작곡까지 해다고 한다. 또한 학교에 관한 포고령 에서 기독교인 교사는 이교도의 저작물(《일리아드》같은 비기독교 저술)을 사용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로서 기독교 학교의 힘을 약화시키고 재정적 타격을 주기 위함이었다. 또한 관용에 관한 포고령 에서 비 기독교 신전을 다시 열게 하고 재산을 반환하는 한편, 교회의 분쟁으로 추방되었던 기독교 사제, 주교들을 다시 복직시켰다.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율리아누스가 안티오키아에 도착했을 때 아폴로 신전이 불에 타는 일이 일어났다. 율리아누스는 이를 기독교인의 소행으로 보고 안티오키아의 가장 큰 교회를 폐쇄했다.

율리아누스는 기본적으로 철학자였고 로마의 몰락 원인이 관용 없는 기독교와 그 제도에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의 기독교는 제국의 영향력을 이미 뛰어넘고 있었고 수많은 특권과 소모적인 논쟁으로 제국의 힘을 좀먹고 있었다고 율리아누스는 판단했다. 율리아누스가 이단의 논란으로 추방된 기독교 주교들을 복직시키고 예루살렘예루살렘 신전을 다시 짓게 하는 등의 조치는 모두 기독교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죽음

363년 율리아누스는 전임 황제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준비하다가 끝내 이루지 못한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원정을 떠났다. 안티오키아에서 9만명의 병력을 모아 그중 3만명을 프로코피우스에게 주어 아르메니아로 보내고 거기서 아르메니아 동맹군과 합세해 북쪽에서 사산제국의 수도로 진격하게 했다. 율리아누스 자신은 직접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사산제국의 영토로 쳐들어가 몇번의 전투에서 승릭하고 사산의 수많은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진군하였으며 트라야누스 황제가 250년 전에 만든 운하까지 이용하였다. 그러나 사산왕조의 수도인 크테시폰에서 사산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게다가 프로코피우스의 제2군은 갈라진지 5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율리아누스는 퇴각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퇴각의 행군중이던 6월 23일 사산 병력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율리아누스는 갑옷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전위와 훙위를 돌아다니며 용맹하게 싸우다가 적의 창에 복부를 깊숙히 찔렸다. 율리아누스의 개인 주치의이자 친구였던 오리바시우스가 모든 조치를 다 취했으나 결국 율리아누스의 부상을 치료할 수 없었고 젊은 황제는 죽었다.
율리아누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로마사산조 페르시아제국 원정은 실패했고 로마 군단을 후임으로 그리스도교인인 요비아누스를 황제로 세웠다. 요비아누스와 그 뒤를 이은 발렌티니아누스 1세, 발렌스의 치세에 율리아누스의 모든 반 그리스도교적인 정책은 폐기되었고, 다신교적인 로마제국의 역사는 율리아누스를 끝으로 막을 내린 셈이 되었다.

[편집] 저술가 율리아누스

율리아누스는 초기에 그리스 철학과 사상에 심취하였다. 아테네에서 공부하면서 신플라톤주의자가 되었다. 그의 저술은 단편적으로 몇편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외에 그리스어로 쓰인 몇 편의 철학적 사변과 콘스탄티우스에게 바치는 찬가와 같은 난해한 저술이 있다.

전 임
콘스탄티우스 2세
제49대 로마 제국 황제
361년 - 363년
후 임
 요비아누스 
타고난 이름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Flavius Claudius Iulianus)



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왕조 이야기



[1] 콘스탄티누스 왕가의 참극



AD337년
5월 22일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자 그 혼란 속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콘스탄티누스 일가에 대한 대학살극이 일어나는데,

할아버지 즉,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그의 두번째 부인 테오도라 사이에서는
4명의 아들(삼촌)들이 있었는데 -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우스, -갈루스, -율리아누스
그중 콘스탄티누스 1세로부터 부제의 칭호를 받은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우스를 비롯한
수많은 콘스탄티누스 왕가의 후손들이 학살을 당한것이다.

이 대학살은 콘스탄티우스 2세 자신이 사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살해되지 않은 것은 당시 12살인 갈루스와 6살 이었던 율리아누스뿐이다.
이것은 율리아누스의 사촌형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자신의 확실한 권력을 위해 뒤에서 조종한 것으로 보인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이로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테오도라 사이에서 태어난 핏줄은
거의 전부가 몰살을 당했는데 콘스틴티누스 왕가의 핏줄중에서 남은 사람은
딱 5명의 남자뿐이었다. 그 다섯사람은 콘스틴티누스 1세의 아들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삼형제와
율리아누스(당시 6살), 그리고 율리아누스의 사촌인 갈루스(당시 12살)였다.

그리고,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삼형제에 의해 3등분 되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살아남은 갈루스와 율리아누스에게 엄격한 아리우스 기독교 교육을 시키며 감시했다.





[2] 콘스탄티누스 제국의 분할
 

 삼형제는 황제(augustus)가 되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제국을 3분할했는데

 (1)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  첫째 콘스탄티누스 2세

 (2) 이탈리아와 아프리카 일리리쿰
       - 셋째 콘스탄스

 
(3) 그리고 나머지 제국동부의 속주들 ...
     트라키아,마케도니아 지방,
     그리스,아시아,이집트
       - 둘째
콘스탄티우스가 차지했다.



  ◀ ◀  콘스탄티누스 1세 상(像)








[3]  콘스탄티누스 왕조. 삼형제의 영토와 종파에 대한 갈등



영토분쟁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콘스탄스 (Flavius Julius Constans, 320년 - 350년)은
337년부터 350년까지 통치한 로마 황제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와 그의 둘째부인 파우스타사이에 태어난 셋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이다.

340년 맏형 콘스탄티누스 2세가 영토를 요구하며 이탈리아로 침입해 들어왔으나
막내 콘스탄스의 선봉 군대에게 패한 뒤 살해당했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나이수스에 있었던 콘스탄스는 이 승리로 제국의 서쪽 지역을 모두 다스리게 되었다.

341년 콘스탄스는
프랑크족의 침입을 맞아 싸워서 갈리아를 방어하고 2년 후에는 브리타니아을 방문하기도 했다.
350년  휘하 장군인 마그넨티우스가 콘스탄스에 불만을 품은 부하들에게 황제로 추대되어
반란을 일으켰고 콘스탄스는 피레네 산맥까지 도망갔으나 붙잡혀 무참히 살해당했다.
마그넨티우스는 잠시 황제가 되어 민족과 종교 갈등을 잘 다스려 부하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351년 무르사에서 콘스탄티우스 2세의 군대에 대패한후 갈리아로 도망쳤고
353년 결국 자살하였다.


종파갈등

다른 콘스탄티누스 왕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콘스탄스는 역시 열렬한 니케아파 그리스도교도 였는데,
아리우스파인 형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타나시우스를 끝까지 추적해 죽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것은 삼위일체를 신봉하고 반-아리우스주의자 동생 콘스탄스의 도움으로
아타나시우스는 풀어나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를 돕기위해 공의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341년에는 이교적인 희생제를 금하는 포고령을 발표하였다



성모 마리아에게 성을 봉헌하는
콘스탄티누스 1세
하기아-소피아 의 모자이크 화(畵)



[4] 율리아누스의 성장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Flavius Claudius Iulianus),
(331년 - 363년 6월 26일)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기개를 가진 철학자이기도 하다

콘스탄티누스 왕조. 361년부터 363년까지 로마 황제였다. 그는 최후의 이교도(비기독교인)
로마 황제로 무너져가는 제국을 위해 로마의 전통을 부활시켜 개혁하려고 노력하였고
이때문에 후세의 기독교인으로 부터 "배교자 율리아누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동생인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를 아버지로 ,
콘스탄티누스 1세의 두번째 부인 바실리나를 어머니로 AD331년 비잔티움에서 태어났다.
친할아버지는 황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고
그의 두번째부인이자 막시미아누스의 딸인 테오도라가 할머니가 된다.

처음에 율리아누스는 비사니아에서 외조모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다.
7살에 니코메디아의 주교인 아리우스주의자 유세비우스에게 교육을 받았고
마드니우스라는 고트족 출신 노예에게 길러졌는데
이 노예는 그리스 고전문화에 정통하여 율리아누스에게 호메로스같은
그리스 고전을 많이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5] 형제의 다툼과 율리아누스의 등장

340년 콘스탄티누스 2세는 앞서 말했듯이 그의 동생 콘스탄스와 다투다가 죽었고 (23세)
이어 350년 콘스탄스도 마그넨티우스에게 죽었다.
350년 휘하 장군인 마그넨티우스가 부하들에게 황제로 추대되어 반란을 일으켰고
콘스탄스는 피레네 산맥까지 도망갔으나 붙잡혀 무참히 살해당했다.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마그넨티우스와 대처하는데 전념하기 위해
율리아누스의 형인 갈루스를 부제(Caesar)에 임명하고 동방을 통치하게 했다.

351년
콘스탄티우스 2세가 마그넨티우스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자 그는
354년 부제 갈루스에게 반역죄를 씌워 처형해 버리고 혼자 제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협이 다가오자 그는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율리아누스를
밀라노로 불러 여동생 헬레나와 결혼시키고 부제로 삼아 제국의 서방을 통치하도록 했다.

처음 부제가 되어서 율리아누스가 맡은 임무는 제국을 침범한 야만족을 격퇴하는 일이었다.
갑자기 부제가 되었을때 까지만 해도 그는 그리스 철학에 심취한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갈리아에서 게르만 부족들과의 전투에서 그는 엄청난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었는데
4차례의 원정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의 성공에 위기를 느낀 콘스탄티누스 2세는 자금지원을 거부하였다.

360년 율리아누스가 갈리아에서 야만족과 대처하고 있을때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2세가 메소포타미아를 침범해 아미다를 함락시켰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에게 갈리아의 병력을 차출해 동부 전선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율리아누스의 군대의 반감을 가져왔고
그의 군대는 율리아누스를 파리에서 황제(Augustus)로 추대했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격노했다.

같은 해 6월 콘스탄티우스의 군대가 아퀼레이아를 점령하고 이제 두 황제의 부대사이에 내전이 불가피하게 되었는데, 11월 콘스탄티우스 2세가 죽었다. 죽기 직전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가 유일한 황제라는 유언을 남겼고 율리아누스는 정식 황제로 등극했다.



율리아누스,
최후의 비기독교인 로마 황제





[6] 율리아누스 치세


율리아누스는 집권과 동시에 콘스탄티우스의 치세동안의 악정을 단죄했다.
비대해진 황궁의 지출을 대폭 삭감하고 모든 환관을 황궁에서 몰아내었다.
또한 황궁의 사치스러움을 제거하고 노예들과 경비병을 줄여서
황궁생활을 크게 간소화하고 그 비용을 줄였다.
그는 또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모범으로 삼아
철학인 황제로서 통치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하였다.



율리아누스와 종교

362년 2월 4일 율리아누스는 모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포고령을 발표한다.
이 포고령에서 모든 종교는 법앞에서 평등하며
모든 로마의 영토에서 로마 제국이 특정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로마가 가진 본래의 종교적 관용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

또한 율리아누스는 학교에 관한 포고령 에서
기독교인 교사는 이교독적인 저작물(《일리아드》같은 비기독교 저술)을 사용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로서 기독교학교의 힘을 약화시키고 재정적 타격을 주었다.

또한 관용에 관한 포고령 에서 비기독교 신전을 다시 열게 하고 재산을 반환하는 한편,
교회의 분쟁으로 추방되었던 기독교사제, 주교들을 다시 복직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율리아누스의 시도는 이미 기독교로 기울어진 로마제국을 과거의 영광스러운
다신교전통으로 돌리는데 역부족이었고 기독교와 로마인들의 강한 반발을 야기시켰다.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율리아누스가 안티오키아에 도착했을 때
아폴로 신전이 불에 타는 일이 일어났다. 율리아누스는 이를 기독교인의 소행으로 보고
안티옥키아의 가장 큰 교회를 폐쇄했다.
이러한 조치로 안티오키아 주민들은 반발했고 결국 그에게 등을 돌렸다.


율리아누스는 기본적으로 철학자였고
로마의 몰락의 원인이 관용없는 기독교와 그 제도에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의 기독교는 제국의 영향력을 이미 뛰어넘고 있었고
수많은 특권과 소모적인 논쟁으로 제국의 힘을 좀먹고 있었다.

율리아누스가 이단의 논란으로 추방된 기독교 주교들을 복직시키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다시 짓게 하는등의 조치는
모두 기독교세력을 약화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철학자 율리아누스

초기에 그리스 철학과 사상에 심취하였다.
아테네에서 공부하면서 신플라톤주의자가 되었다. 그의 저술은 단편적으로 몇편이 전해져 내려온다.

* 〈미소포군〉(Misopogon) : 턱수염을 증오하는 자들
- 안티오키아에서 자신의 턱수염(그리스적인 외모를 빗댐)을 놀리는 주민들에게 맞서 저술함
* 〈갈릴레아인들에 반대하며〉: 기독교인들에 대한 비판
* 〈황제들〉:기독교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를 비롯한 몇몇 로마황제들에 대한 우화적인 내용

이외에 그리스어로 쓰인 몇 편의 철학적 사변과
콘스탄티우스에게 바치는 찬가와 같은 난해한 저술이 있다.


율리아누스의 기둥


율리아누스 大帝 앙카라 방문 기념으로 
뷰멧광장(14M) 세움




전쟁과 죽음

363년
율리아누스는 전임황제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준비하다가 끝내 이루지 못한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원정을 떠났다.

안티오키아에서 9만명의 병력을 모아
그중 3만명을 프로코피우스에게 주어 아르메니아로 보내고
거기서 아르메니아 동맹군과 합세해 북쪽에서 사산제국의 수도로 진격하게 했다.

율리아누스 자신은 직접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사산제국의 영토로 쳐들어가
몇번의 전투에서 승릭하고 사산의 수많은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진군하였다.
그러나 사산왕조의 수도인 크테시폰에서 사산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결국 율리아누스는 퇴각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퇴각의 행군중이던 6월 23일 사산 병력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율리아누스는 갑옷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용맹하게 싸우다가
적의 창에 복부를 깊숙히 찔렸다.
율리아누스의 개인 주치의이던 오리바시우스가 모든 조치를 다 취했으나
결국 율리아누스의 부상을 치료할 수 없었고 젊은 황제는 죽었다.

전승(傳承)에 의하면 황제는 죽을 때 마지막으로 "Vicisti, Galilaee"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번역하면 " 갈릴리 인이여, 당신이 이겼소! "라고 한다. (갈릴리인은 예수를 뜻함)


다시 기독교 제국으로 전락

율리아누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로마의 사산제국 원정은 실패했고
로마 군단을 후임으로 기독교인인 요비아누스를 황제로 세웠다.

철학적 개념이 없는 철저한 군인 요비아누스의 짧은 치세에
기독교는 다시 로마의 국교로 인정되었고, 라바룸은 다시 로마군단의 상징이 되었다.
모든 종교적 관용 조치가 다시 폐기되었다.

요비아누스와 그 뒤를 이은 역시 철학적 개념이 없는 철저한 군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 그의 동생 발렌스의 치세에
율리아누스의 모든 반 기독교적인 정책을 폐기되었고
로마는 다시 기독교의 제국으로 돌아갔다.


 라바룸(라틴어: labarum)은
 그리스도라는 명칭을 그리스 문자로 쓴 것
 (그리스어: ΧΡΙΣΤΟΣ 또는 그리스어: Χριστ??)의 처음 두 글자
 카이(Χ)와 로(Ρ)를 겹쳐놓은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꿈에 나타났다고 전해 내려온 문양

반응형
,